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호르헤 포사다 (문단 편집) === [[뉴욕 양키스]] === 1990년 드래프트에서 24라운드, 전체 646위[* 입단 동기가 앤디 페티트인데, 페티트는 594위로 입단했다.]로 뽑혀 양키스에 입단한다. 드래프트 순위와 나이를 보면 알 수 있듯 즉전감은 아니었다. 지명 당시에는 포수와 내야수(주로 2루수)를 봤으나 포수로 쓰기엔 송구 능력이 떨어지고, 내야수로 쓰기에는 어린 나이를 감안해도 돌글러브 기질이 심했다. 그러나 포수를 볼 수 있으면서 타격이 괜찮아 로우 A부터 트리플 AAA까지 차곡차곡 한 단계 밟아 나갔다. 그러나 당시 양키스 포수 자리에는 마이크 스탠리, [[조 지라디]] 등이 버티고 있었기에 메이저리그에서도 95년 1경기 출전[* 교체 선수로 출전해 조 아우사니오의 공을 받았다], 96년 8경기 출전[* 첫번째 선발출장을 한 해로 [[로저 클레멘스]]의 공을 받았다.], 97년 60경기 출전 등 점점 출전시간을 늘려나가야 했다. 그리고 주전을 꿰찬 98년, 111경기에서 17홈런으로 포수로서 상당한 장타력을 뽐냈다. [[데이비드 웰스]]와는 배터리 궁합이 잘 맞았는지 이 해 [[퍼펙트 게임(야구)|퍼펙트 게임]]을 달성하기도 했다. 1998년부터 2000년까지의 양키스 왕조의 월드 시리즈 3연패에 일조했고, 2000년에는 28홈런을 치는 등 타격이 진일보해 이후 4년 연속으로 올스타 출전, [[실버슬러거]] 수상에 성공했다. 2003년에는 MVP 투표에서 3위까지 할 정도로 기량이 만개했다. 2007년 시즌이 끝난 뒤 FA 자격을 취득해 4년 5240만 달러에 잔류했다.[* 총액으로는 못 미치지만 평균 금액은 [[마이크 피아자]]의 메츠 계약을 뛰어넘는 계약이었다.] 그러나 포수가 워낙 단명하는 포지션이기도 한 탓에 이후 자주 부상에 시달리게 되는데, 타격보다 수비의 쇠퇴가 두드러진다. 2009년에는 [[A.J. 버넷]]과의 불화설이 있었는데 당사자들은 이를 부인했으나 실제로 포사다가 마스크를 쓸 때보다 수비형 백업포수 [[호세 몰리나]]와 배터리를 이룰 때 버넷의 성적이 훨씬 좋았던 것도 사실이고 버넷의 커브를 포사다가 블로킹하기 힘들어하기도 했다. 예전 [[데이비드 웰스]]의 알콜 커브를 받아내던 모습을 생각하면 격세지감.[* 과거 [[마이크 무시나]]의 너클커브를 받아낼 때도 이리저리 고생하는 경우가 많았다. 버넷도 마찬가지.] 블로킹 뿐만 아니라 2루 송구도 나빠졌다. 그렇지만 수비 하는 내내 블로킹과의 싸움을 하다가도 장타로 게임을 뒤집는 등 지명타자로서의 가치도 충분하다. [[로빈슨 카노]]가 클린업 울렁증을 극복 못했을 시기에는 간혹 5번 타자로서도 출전했을 정도다. 사실 양키스 측에서는 계약기간 내내 포사다를 포수로 쓸 생각은 아니었고 계약 후반에는 트레이드로 데려온 [[닉 스위셔]]와 함께 1루수와 지명타자 슬롯에도 활용할 계획이었는데 2008시즌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하는 대참사가 터지자 [[조지 스타인브레너|보스]]가 덜컥 [[마크 테세이라]]를 질러버렸고 지명타자에는 [[마쓰이 히데키]]가 있는터라 포수 마스크를 길게 쓰게 된 면도 있다. 2011시즌엔 양키스에는 수비형 백업포수인 [[프란시스코 서벨리]]가 있고 팜에는 베네수엘라산 대형 공격형 포수 재능 [[헤수스 몬테로]]와 상당한 수준의 수비형 포수 유망주인 [[오스틴 로마인]]이 대기하고 있는 상태였으며, [[로스앤젤레스 다저스]]에서 논텐더로 풀린 포수 [[러셀 마틴]]마저 데려왔기 때문에 2011시즌의 포사다는 주로 [[지명타자]]로 나서게 되었다. 2010 시즌까지 통산 올스타 출전 5회, 실버 슬러거 수상 5회. 결국 2011년에는 스프링캠프부터 포수 마스크를 빼앗기고 팀 연봉만 잡아먹으면서 지명타자로 나설만큼 타격 컨디션을 유지하지도 못해서 팀의 잉여가 되었고 연봉 포기하고 은퇴하라는 압박을 받기도 했다. 9번 지명타자로 나서라는 [[조 지라디]] 감독의 명령에 불응하여 스캔들이 불거지기도 했고 [[앤드루 존스]]가 지명타자로 출전하는 경기도 많아지며 [[플래툰(야구)|플래툰]] 시스템으로 인해 고생하기도 했다. 2011년 3천안타를 달성한 [[데릭 지터]]와 602세이브로 올타임 세이브 리더가 된 [[마리아노 리베라]]를 축하하는 모습에 양키스 팬들은 세월이 이리도 빨리 지나갔다는 데에 탄식을 내뱉었다고. 그래도 경기 중간중간 팀에 파이팅을 불어넣고 루키 [[헤수스 몬테로]]를 불러앉혀놓고 이리저리 가르쳐주기도 했다. 가끔 승부가 많이 벌어졌을 때 2루나 1루로 출전하는 모습은 양키스 덕아웃에서 [[닉 스위셔]]와 함께 새로운 활력소가 되었으며[* 실제로 8월 25일 오클랜드와의 홈경기에서 메이저리그 커리어로는 처음으로 2루 대수비로 등장해서 1이닝 동안 타구처리를 해내는 등 홈팬들에게 여러가지 즐거움을 주었다. 여담으로 이 날 양키스는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초로 1경기 3개의 그랜드슬램으로 기록을 세운터라 점수차이가 큰 상태여서 포사다와 팬 모두에게 추억을 만들어준 셈.], DH로든 [[대타]]로든 타석에 들어설 때마다 양키 팬들은 기립박수로 그를 맞아줬다. 특히 포수들이 잇따라 부상을 당하면서 백업포수가 없이 나선 [[러셀 마틴]]마저 부상을 당했을 때 [[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]] 원정에서 DH를 보던 몬테로가 포수 장비를 준비하고 [[CC 사바시아]]가 타격에 들어서게 생겼을 때 홀연 마스크를 쓰고 나타났을 땐 LA까지 따라온 양키 팬들은 물론 일부 에인절스 팬들까지 환호를 보내기도 했다. [[http://nyypark.tistory.com/entry/911-Jorge-Posada2011firstcatcherin|포사다의 2011 첫 포수 출전]]. 이후 팀은 와일드카드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해 디비전 시리즈에 진출했으나 탈락했고 그렇게 그는 2011년 시즌이 끝나고, [[조 지라디]]와 [[데릭 지터]] 등이 참석한 가운데 1월 24일 은퇴식을 가졌다. 17년동안 양키로 있을 수 있게 해준 팀과 팬들에게 감사하다고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